새해가 왔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는데 우리는 우리가 정의한 시간의 개념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른 새해를 맞이하면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산다. 차갑게 말해서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는 다르지 않은데, 많은 이들이 새해의 아침 해를 만나기 위해 산에 오르고 바다를 찾아 그 모습을 담아내려고 한다. 왜 이것들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난 연말, 어느 유명한 재단에서 진행하는 1박2일의 북캠프 모임에 다녀왔다. 어떤 모임인지 잘 몰랐던 터라, 어떤 기대도 없이 참석했다. 가볍게 짐을 챙기고, 숙제로 작성한 A4지 한장(지난 해의 회고와 다가올 해에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적은)을 가지고 참석했다. 때로 인생은 작은 기적을 매순간 가져온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를 뿐이고, 그것이 어떤 기적을 만들어내는지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숙제로 작성했던 나의 찌글찌글했던 과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때 써 놓았던 다가올 2026년 나의 테마였던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내서 데이터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올해 나는 사회인으로 일을 한 시간이 30년 차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주제 중의 하나는 이 오랜 시간의 삶과 일의 흔적을 그 몇줄의 이력서로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구나 그 요약 몇 줄로 내가 평가 받고, 누군가를 이해시켜야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였다. 달리 표현하면 직장인으로서 대부분의 삶을 살아온 나의 기록은 공식적으로 이력서에 적혀진 기록이 어쩌면 다 일수도 있겠다는 공허함 또는 허무함 같은 것이 나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물론 성실하게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본인의 지식과 경험을 체계화하신 훌륭한 직장인들도 많이 있다. 다만 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을 뿐이다.
직장인의 삶은 대체로 이력서에 적혀진 기록들로 평가가 되고, 재직증명서에 나올 수 있는 경력만이 경력들로 인정을 받는다. 공식적인 시스템 안에서 증명 가능한 기록들만이 ‘일’로 인정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말이다. 우리는 사실 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평가하고, 나와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는 것은, 사실 그 이력서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기록들, 그것들과 연결이 된 기억들이라는 것을. 이력서에 적히지 않은 혹은 적힐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사실은 그 사람을 더 잘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그 북캠프에서 어떤 분이 하신 멋진 문장 하나를 인용해볼까 한다.
“삶은 선을 그리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물어본다. 데이터가 뭔데? 누구나 알고 있으나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 데이터.
나는 데이터를 이렇게 정의해보자 한다. 데이터는 기록된 현실의 조각이다. 그리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 증거이고, 행동을 만드는 근거다.
우리가 겪어낸 모든 현실의 조각들이 데이터고, 이 데이터를 연결하는 작업들이 바로 맥락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언제, 누구와 어떤 것들을 왜 하게 되었는지가 맥락이고, 그 맥락이 있어야 그 현실의 조각들이 의미가 있어진다. 그렇다면, 이 선을 그리는 작업들이 우리가 하루하루 해내는 작지만 의미 있는 행동들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의 삶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2026년에 가장 많이 회자되고 우리가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많이 듣게 될 단어는 단언코 AI와 데이터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가 남기는 사소하지만 별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디지털의 흔적들이 데이터로 쌓이고 있다. 여러분이 동의했든 혹은 동의하지 않았든 어떤 맥락을 가지고 수많은 플랫폼에서 연결이 될 것이고, 이것들은 어김없이 AI라는 도구를 통해 해석되고 추론되고 설명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남기는 이 데이터들도 마치 우리 인생의 기록처럼 그 형태가 참 다양하다는 점이다.
어떤 데이터는 이력서처럼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엑셀의 셀 안에 딱딱 맞춰진 숫자들처럼. 이런 것들을 정형데이터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누가 봐도 명확하고, 비교하기 쉽고, 계산하기 편하다. 마치 우리가 이력서에 적는 그 깔끔한 경력 기록같다.
하지만 우리 삶의 대부분은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친구와 나눈 카톡 대화, 일기장에 휘갈겨 쓴 글, 유튜브 영상, 녹음된 회의 내용, 우리가 찍어놓은 사진들. 이런 것들을 비정형데이터라고 한다. 이것들은 정해진 틀이 없고, 자유롭고,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마치 이력서에는 적히지 않지만 우리가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의 수많은 대화와 웃음과 갈등의 순간들. 그리고 그 안에 당신이 경험한 수많은 실패와 그것으로 배운 수많은 교훈들은 말하자면 이 부류에 속하는 데이터다.
그리고 그 중간쯤 어딘가에 반정형데이터라는 것도 있다. 어느 정도 구조는 있지만 완전히 딱딱 떨어지지 않는 형태다. 우리가 SNS에 올리는 게시글이 그렇다. 좋아요 수는 정형화되어 있지만, 글의 내용과 사진은 자유롭다.
또 하나 흥미로운 구분이 있다. 숫자는 흔히 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셀 수 있는 데이터를 이산데이터(Discrete Data)라고 하는데 딱딱 떨어지는 값들이다. 사람은 1명, 2명이지 1.5명이 될 수 없고, 출석은 했거나 안 했거나 둘 중 하나다. 주사위를 던지면 1부터 6까지 정수만 나온다. 3.7이 나올 수는 없다.
반대로 연속데이터(Continuous Data)는 그 사이사이가 모두 의미를 갖는다. 온도는 25도에서 26도로 가는 중간에 25.1도, 25.237도, 무한히 세밀한 값들이 존재한다. 키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속도도 그렇다. 인류가 합의한 2026년이란 해는 사실은 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어느 지점이다.
흥미로운 건, 디지털 세상에서는 이 모든 것을 이산적인 조각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사실 시간은 연속적으로 흐르지만, 디지털 시계는 초 단위로 딱딱 끊어진다. 우리 목소리도 원래는 연속적인 파동이지만, 녹음되는 순간 1초에 수만 번씩 쪼개진 이산적 샘플들로 변환된다.
데이터를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삶이라는 선을 그리는 그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이 감정, 이 생각, 이 행동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는 것. 어떤 이는 사진으로, 어떤 이는 글로, 어떤 이는 숫자로 남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형태든, 그 순간의 현실 조각을 붙잡아두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조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기록이 객관적 흔적이라면, 기억은 주관적 재구성이다. 우리는 기록된 것들을 보면서 그때의 맥락을 떠올리고, 감정을 되살리고, 의미를 부여한다. 북캠프에서 작성했던 그 A4 한 장의 글도, 그 자체로는 단지 종이 위의 잉크 자국이지만, 그것을 다시 읽을 때는 그 순간의 고민과 다짐이 되살아난다.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그 많은 현실들을 다 기록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형태든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기억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결정할 문제다.
그런데 누구든 자신이 만들어 낸 수많은 의미 있는 것들을 기억하고 싶다면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야 한다.
이제 내가 만난 작은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나는 고백하건데, 때로 나의 기록들을 리부팅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 남들에게 뭐라도 전문가처럼 보여야하다는 강박과 뭐든 제대로 해야된다는 (그 제대로의 기준이 무엇인지 사실 잘 모른다.) 집착으로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런데 ‘쓰임이 있던 것들을 다시 쓰이게 하게 하고 싶다’는 그 모임에서 만난 목공 전문가의 이야기가 나에게 다시 이 글을 쓰게 하는 용기를 주었다. 한 때 쓰임이 있었던 이 블로그 안, 내 글의 조각들이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다시 누군가에게 쓰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나의 글들과 그 안의 맥락들이, 관점들이, 아직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는 AI의 세상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이 새해에 나는 다시 기록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내가 만난 작은 기적이다.
무한히 세밀하게 흐르는 시간의 틈새에서, 기적같이 저와 이 글로 만난 여러분께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기적은 일상에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